(사진좌측부터 필자 조영섭 전 아마추어 청소년대표·국가대표 상비군·공군사관학교 강사, 강동희 서울 복싱협회 심판위원)
(사진좌 김기식 신우실업 대표 · 강동희 부회장, 우측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광선 · 강동희 부회장)
김현승 님의 가을의 기도란 시 구절이 생각나는 고즈넉한 지난 주말 필자는 전 서울연맹과 실업연맹 부회장을 지낸 강동희 서울 복싱협회 심판위원을 만나러 그가 나고 자란 경기도 고양시로 향했다.
강 위원은 1950년 이곳 태생으로 1966년 복싱사관학교 남산 공전에 입학, 한국체육관에서 한국 아마복싱의 전설 노병렬 사범 휘하에서 복싱을 체득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남산 공전은 이창길, 김현치, 황철순, 김창석, 박인규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역대급 복서들을 배출한 복싱 명문 학교다. 1955년 3월 창설한 한국체육관은 당시 관원이 무려 800명에 달해 송곳 하나 꽂을 곳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뤄 웬만큼 기량이 특출나지 않으면 스파링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관원들이 차고 넘쳤다.
노병렬 사범은 40년간 링을 지키며 길러낸 제자만 한수안, 송순천, 김기수, 정동훈, 이문용, 김덕팔, 정신조 등을 비롯해 5만 명에 이룰 정도로 초창기 한국복싱 역사의 격동기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강 위원은 선수와 지도자의 관계에서 선수는 연(Kite)과 같다고 했다. 단단하게 잡아주고 때론 풀어주는 강력한 줄이 없다면 선수는 멋대로 날아가 구름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관계로 노병렬 사범 특유의 밀고 당기는 연금술사 같은 지도력으로 수많은 선수를 배출 중앙체육관·영등포체육관과 함께 명망 높은 체육관이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이곳에서 복싱을 수련한 강 위원은 1968년 3월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 스커드 미사일처럼 위력적인 레프트 카운터를 주무기로 5전 전승 (4KO) 을 거두며 라이트 플라이급 최재호, 페더급 정호진, 라이트급 송대섭과 함께 밴텀급을 석권한다.
당시 서울 신인대회는 페더급에 출전한 후 1970년 아시안게임과 1971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웰터급 2관왕을 차지한 정영근도 예선에서 탈락할 정도로 두터운 뎁스 (Depth)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의 경기를 참관한 최초의 국내 세계 챔피언이자 한국체육관 선배인 김기수는 단단한 체형에 사우스포 강타자인 그에게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밴텀급 은메달 송순천의 재래(再來)라 부를 정도로 강동희는 전도유망한 복서였다.
하지만 그는 출전한 경기마다 중앙체육관의 물찬 제비 김태호( 대경상고)의 빼어난 동체 시력과 빠른 몸놀림, 미꾸라지처럼 잽싸게 빠져나가는 그의 빠른 발을 잡지 못해 연패를 거듭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너의 권투는 여기 까지다라는 폭탄선언과 함께 그의 복싱용품을 아궁이 속에 집어넣고 불살라버렸다.
결국 복서로 꿈과 야망이 담배 연기처럼 사라진 강 위원은 남산 공전을 졸업한 후 1971년 6월 군에 입대 기갑부대 하사관으로 34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1974년 재대를 한 후 1975년부터 중구 북창동에서 주류사업에 매진 특유의 경영 능력으로 사업체를 반석 위에 우뚝 세워 놓는다.
사업이 번창하자 그는 견우와 직녀처럼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복싱계에 불혹이 훌쩍 넘은 1992년 늦깍이 서울심판으로 컴백. 오랜 세월 숙성된 위스키처럼 감미롭고 고혹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공명정대한 포청천으로 활약하면서 사업에서 창출된 이윤을 새천년 서울복싱연맹 부회장과 2015년 실업연맹 부회장직에 봉직(奉職)하면서 복싱에 재투자하는 등 음지에서 운동하는 불우한 복서들을 소리소문없이 후원 현역 시절 못다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런 올곧은 심성을 지닌 강 위원에게 미스터 쓴소리라 불릴 정도로 강직한 대한복싱협회 호계천 심판은 정도를 걷는 올바른 선배라고 표현했다.
강 위원은 한국체육관출신 후배이자 88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광선을 가장 좋아한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김태호에 3연패를 당한 후 복싱을 접었으나 김광선(한양공고)은 숙적 허영모(순천 금당고)에 3연패를 당하고도 절차탁마(切磋琢磨) 진군을 거듭 한국복싱사상 최초로 세계대회 금메달(1983년 로마 월드컵)을 획득한 그의 감투 정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볼 때는 사물들의 세상인 물리학에서는 정답이 있어도 살아가는 세상에 정답은 없다. 어느 한계를 정해놓고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보고 아니다 싶은 순간이 오면 강 위원처럼 과감히 포기하는 마음가짐도 부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동물 세계에서 호랑이가 먹잇감을 전력으로 질주하며 사냥을 시도하다 눈 깜박할 사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타킷(Target)에 미련 없이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준비하듯이 말이다. 어느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는 뒤돌아설 수 있는 용기라 갈파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지지(知止)라 말했다. 멈출 때를 알라는 뜻이다.
각설하고 강 위원은 잡초 복서 양회열처럼 자식 농사도 풍년이다. 아들은 법대를 나와 대기업에 근무 중이며 딸은 상명여대와 서울여대 대학원을 졸업, 현재 광명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강 위원은 수년 전 자신이 운영하던 정형외과 이사장직을 내려놓고 고양에 칩거하면서 풍광 좋은 별장이 있는 강원도 고성을 왕래하면서 김기식·김덕우 아마복싱 50년 범띠 동료 복서들과 삼총사를 형성 인생 3막을 유유자적 (悠悠自適) 하며 지내고 있다. 강 위원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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